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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17

[단편] 볼륨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남들 다 이런 소리로 듣는데, 그쪽만 크게 듣고 있던 거였어요." "그래요?""네, 그러니까 약 끊지 말고 꼭 드셔야 해요. 지금은 이 볼륨이 적응이 돼서 그런 거예요. 적응된 소리로 듣기 시작하니까 정상인 줄 아는 거지만, 약 끊으면 더 심해질 수도 있어요."그래, 그런가 싶었다. 남들 다 이런 정도로 소리를 듣고 있었다니. 나는 남들의 시선이나 말과 행동에 너무 큰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적응기가 어느 정도 필요했고 나는 그 적응기를 지나고 있었다."네, 알겠습니다."언제 끊어야 할지 모르는 약을 매일 먹는다는 건 메마른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다.병원에서 집에 오는 길에 간단한 요기거리를 샀다. 그러곤 집 근처 물길이 있는 곳에서 바람을 좀 쐬다 왔다."무서워서 그..

그냥 2021.05.01

[잡문] 오래된 편지

긴 청바지에 까만색 코트 그리고 부끄러운 듯 흰 마스크로 가린 얼굴. 나도 까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널 만나러 갔지. 서로 얼굴 쳐다보기도 부끄러워 서로 밥만 깨작댔고, 내 소매를 잡고서 나를 끌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은근슬쩍 나에게 기대어 수줍게 걸어갔어. 한 줌 낙엽들도 날아가 버렸으니, 이젠 날려 보내야지. 우리 사이가 점점 굳어져 간다고 생각할 때쯤, 넌 아마 무뎌지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런 시간이 스치는 와중에, 네가 묻더라. "나 소개받을까?" 난 네가 무슨 의도로 그걸 나에게 묻는지 알지 못했어.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알게 되었지. 왜냐면 넌 지난번에도 나에게 "나랑 너랑 무슨 사이야?" 라고 물었으니까 말이야. 유추하는 데는 내가 눈치가 없어서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도 난 후회..

잡글 2021.01.04

[잡문] 사랑의 이유로

사랑의 이유로 더보기너도 이제 약한 모습을 내게 보이는구나.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때 나는 기쁨을 느낀다.네가 비로소 우리의 관계에서 약해질 준비가 되어있음을 내가 받아들일 때,내가 너에게 보여준 약함의 증거들이 매듭지어진다.- 증거 사랑인 것에 이유를 갖다 붙이기엔 내게 사랑은 너무나도 선험적이다.내 관점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에 편향되어있지 않고 사람 자체로만 볼 수 있게 된다.의미가 불어나 흙더미가 된다. 비가 와도 쓸려내려가지 않을 정도가 되면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이 사람을 왜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는 채그저 단단해진 흙더미 위를 같이 오를 뿐이다.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이유 따위를 붙일 수 없다.이유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직 좋아함에 머물러..

그냥 2020.12.06 (4)

[단편] 큰 새와 작은 새

큰 새와 작은 새 어느 숲엔 작은 새와 큰 새가 있었어요. 그 숲엔 두 마리의 새 말고는 다른 동물들은 없는 천혜의 낙원이었답니다. 작은 새와 큰 새는 바다를 항해하며 마주치게 되었어요. 종은 서로 달랐지만 오랜 여행을 한 탓에 둘은 너무 외로웠어요. 그래서 서로 친구가 되기로 했답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했던 작은 새와 큰 새는 숲에 도착해서야 서로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엇, 얘는 부리가 나보다 크구나.' '얘는 나에게 없는 물갈퀴가 있네?' 바다 위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숲에서 점차 드러나게 되었고,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작은 새와 큰 새였어요. '저 큰 부리로 나를 잡아먹으면 어떡하지..?' '물갈퀴가 있어서 부럽다... 나도 저런 멋진 물갈퀴가 있었으면.' 서로에..

잡글 2020.12.05

[단편] 옆집에 새 주인이 왔다

1 본가에서 이제 막 내 집으로 돌아온 첫날.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온 것 같다. 며칠 전부터 옆 방에서 물건 끄는 소리, 못 박거나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이제 막 들어왔나 보다. 근데 좀 이상하다. 보통 내 출근 시간은 아침 8시, 퇴근 시간은 새벽 1시쯤이다. 퇴근 후 우연히 집 앞에서 옆집의 창을 바라봤는데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잘 시간만 되면 사진 찍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가 도대체 자기 집 안방 전구를 빨간색으로 해놓지? 아니, 그리고 새벽에 도대체 무슨 사진을 찍는 거야?' 그 후 매일 퇴근할 때 그 집 창문을 바라보게 되었고 항상 집에 들어가기 전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마다 퇴근 후 집에서 간단히 혼자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

잡글 2020.12.04 (6)

[단편] 파도, 불꽃놀이 그리고 장마

썰물일 때 만나, 밀물일 때 헤어져 이런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 쇠창살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우리는 그렇게 길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길어져 지루해져도 좋았을 것을.] [네가 가끔만이라도 나에게 와도 좋았을 것을.] 썰물일 때 만나, 깊었던 밀물이 되었다. 네가 이제 그만 놀자 하며 해변으로 나와 고운 모래를 손아귀에 한 움큼 쥐었을 때, 나는 그 사이로 흐르는 반짝거림을 보았다. 모래였을까. 그 날 우리는 폭죽을 몇 개 사와 하늘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네가 무엇이길래 이리 덧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생각하던 중 네가 말했다. "폭죽이 터지면 그 자리에 연기가 생겨." "그렇지."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폭죽처럼 터졌다가 연기처..

잡글 2020.12.03 (2)

[단편] 달, 빛

"내 새벽의 달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내 가을 아침의 첫 번째가 되어주어서 고마워."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말이다. 말하지 않아서 내 안에 더욱 빛나게 남았던 말이다. 말하지 않음으로 내 안에 작은 보석을 남겨둔 느낌. 가끔은 말보다도 행동이 더 낫다. 번지르르한 그런 말들 보다 가슴 속에 보석을 쌓아두면, 자연스레 나오는 그런 행동들이 있다. 지금 내 행복의 척도는 서로의 가슴에서 빛나는 것들을 마주보는 일이다. 난 네 이름이 좋고, 네 목소리가 좋다. 내 안에서 빛나는 것들이, 평소에 빛나지 않는 것들까지 빛나게 만들어준다. 너도 날 그렇게 바라봐주길 달을 보며 생각한다. 너와 만나고 나서 달이 밝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너도 그렇게 보아주길 바란다.

잡글 2020.11.30

[모음] 남겨짐에 대해(feat. ZICO)

1. 해변에 놓은 돌 네가 머물렀던 곳이 그리워질 때 다시 나를 찾게 될 거야 2. 꽃이 피는 이유는 지기 위해서라고 지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위해서 꽃몽우리를 피우는 거라고 3. 위급 시 아기 먼저 구해주세요. 4. 눈이 녹으면 뭐가 되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다 다들 물이 된다고 했다 소년은 봄이 된다고 했다 -웍슬로 다이어리 5.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믿는다 믿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지? 어떠한 것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 어떠한 것을 보고 만난 것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헤어질 이유가 되는 것이다 헤어질 이유는 만드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6. 어떤 이는 말한다 사랑은 필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로 한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사랑은 찾아서 가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사랑은 필요로 하..

잡글 2020.11.28

[잡글] 벽틈의 민들레

벽틈의 민들레 "그립니 그 사람?" "매일 떠올라." "사실이야?" "실은 그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너를 뒤돌아보게 하는 사람은" "딱딱한 벽틈에 핀 민들레 같은 사람." "여전히 그렇다는 얘기네. 난 네 틈을 보지 못했어." "틈을 안 보여줬겠지. 있었어도 아마 넌 피지 못했을 거야." "슬프다." "가. 가도 돼." "싫어. 조금이라도 질척거려서 그냥 딱딱하게 굳어도 되니까." "넌 내가 될 수 없어.." "나중에 발려서 색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너와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 그래. 조금이라도 옆에 있다가 쓸려가, 그럼." "응.."

잡글 2020.11.17

[단편] 나의 아저씨

나의 아저씨 어느 날, 날 키워주었던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얘야, 넌 내가 널 떠나면 어떨 것 같니?" "슬플 것 같아요." 아저씨와 깊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연고도 없는 날 거두고 키워준 아저씨. 고아원에서 누군가 내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었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굳은살이 박인 손, 눈가의 주름으로 나에게 낯익음보다는 낯섦을 주었던 당신. 하지만, 손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따듯했다. 세상 처음으로 태양보다 따듯한 손을 잡았던 때였다. 엄마가 죽은 당시,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내 손을 잡혀본 적이 없었다.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저씨는 항상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고, 가끔은 툴툴대며 장난도 거는 나에게는 가장 친근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잡글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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