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잡문] 사랑의 이유로

새우감바스 2020. 12. 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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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ed by @carrotcake

 

 

 

사랑의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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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제 약한 모습을 내게 보이는구나.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때 나는 기쁨을 느낀다.

네가 비로소 우리의 관계에서 약해질 준비가 되어있음을 내가 받아들일 때,

내가 너에게 보여준 약함의 증거들이 매듭지어진다.

- 증거

 

사랑인 것에 이유를 갖다 붙이기엔 내게 사랑은 너무나도 선험적이다.

내 관점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에 편향되어있지 않고 사람 자체로만 볼 수 있게 된다.

의미가 불어나 흙더미가 된다. 비가 와도 쓸려내려가지 않을 정도가 되면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이 사람을 왜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는 채

그저 단단해진 흙더미 위를 같이 오를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이유 따위를 붙일 수 없다.

이유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직 좋아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거나 그저 단순한 호감과 호기심일 것이다.

흙더미가 쌓이기도 전에 무너지는 것은 바로 그 이유들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왜 쌓아도 쌓아도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지에 대해 묻는다.

흙더미 안에 무엇을 놓았는지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간신히 땅 위에 올려지는 흙더미를 지탱하고 있는 가냘픈 나무 막대기 정도. 그것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유들이 존재했어도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 나무 막대기들은 흙더미에 묻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존재했는지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마음껏 사랑할 수밖에. 힘이 닿는대로 사랑의 산을 쌓아가고 다질 수 밖에. 우리가 쌓는 것이 어떤 경치를 보여주게 될 지 모름으로, 그저 서로를 힘껏 안을 수 밖에.

 

사랑이 된 사람들은, 산이 무너지고 나서야 처음 그곳에 무엇을 놓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무엇을 놓고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뿐 그것에 어떤 의미도, 좋음도 나쁨도 없는 것이다. 사랑에 공식은 없고, 전후 단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끝이 나는 방식 또한 모두 제각각이기에 우리는 사랑의 공식을 의논할 수도, 사랑의 시작과 끝맺음에 대해 답을 내릴 수도 없다.

철학은 답이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답이 없는 것들은 항상 진리를 찾아 헤매게 만들며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진리에 도달하고 싶어 길을 헤매고 서로의 길을 만들어 나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사람의 생각이 난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과 사랑은 닮아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좋음의 추구, 아름다움의 추구, 욕망, 사랑에 대한 철학적 물음과 길들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인간이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가장 잘 다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와 철학에서도 사랑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건 확실하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번식을 위해 생겨나는 감각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왜 그것을 인간이 추구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할 재간이 없다. 그냥 추구하게 된다.

그것이 진리인 것 마냥 추구하게 된다.

 


 

추상적인 느낌으로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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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안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

블랙홀은 시공간마저 뒤트는 거대한 중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만약 지구상에 있는 스쳐지나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어떤 특정한 '그 사람'에게 끌린다면,

그건 지구 밖에나 존재하는 블랙홀의 중력과 다름 없이 느껴진다.

행성과 행성 사이의 이끌림, 블랙홀이 시간을 왜곡시키고 공간을 뒤틀리게 하는 힘같은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강한 끌림. 뉴턴의 법칙을 거스르고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근본적인 힘.그 정도가 될 것 같다. 너와 내가 이 땅에서 만나, 감정적으로 그 어떤 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우주는 지구상의 법칙과 다른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우주를 넘어 만나고 있는 것이다. 

 

너에게 쓰는 글인데, 거창한 말들을 늘어놔버렸다. 사실 이 글도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쓰이지 않았을 글이다.

모르겠다. 이제는 이러한 말들이 다 쓸모없이 느껴진다.

사랑은 글을 쓰게 한다. 널 사랑할 땐 글이 쓰인다.

 

내게 묻는다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내가 마지막에 찾은 이유다. 그 이유로 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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